질화로 2015. 9. 26. 07:14

양주동 박사 란 분이 계셨다. 돌아가신지 벌써 40년이 되어가나 보다. 자칭 '국보'라고 한다고 해서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학자신데, 국어책에 나온 이 글만은 머릿속을 맴돈다.

돌이켜 우리 집은 어떠했던가? 나도 5, 6세 때에는 서당아이였고, 따라서 질화로 위에는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찌개 그릇이 있었고, 사랑에서는 밤마다 아버지의 담뱃대 터시는 소리와 고서(古書 )를 읽으시는 소리가 화로를 둘러 끊임없이 들렸었다. 그러나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그 소리는 사랑에서 그쳤고, 따라서 바깥 화로는 필요가 없어졌고, 하나 남은 안방의 화로 곁에서 어머니는 나에게『대학(大學)』을 구수(口授)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마저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그 질화로 옆을 기리 떠나가시었다. 그리하여 서당아이는 완전한 고아가 되어, 신식 글을 배우러 옛 마을을 떠나 동서로 표박(漂泊)하게 되었고, 화로는 또다시 찾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질화로의 찌개 그릇과 또 하나 질화로에 깊이 묻히던 장죽, 노변(爐邊)의 추억은 20년 전이 바로 어제와 같다.

 

표박, 질화로, 노변의 추억.